Homo Economicus

텍스트가 우리의 시작

텍스트라고 부르는 것들이 있다. 대체적으로 이것들은 글의 형태를 띈다. 글이 전달되는 방식은 산문, 시, 기사, ✷

THE HIDEAWAY

텍스트라고 부르는 것들이 있다. 대체적으로 이것들은 글의 형태를 띈다. 글이 전달되는 방식은 산문, 시, 기사, 논평, 암호문, 수식 등 그 방식이 다양하지만, 어쨌든 특정 언어를 통해 전달된다. 언어는 인간이 만들어낸 시대적 산물이다. 그 역사는 인류가 본격적으로 기록이라는 행위를 시작한, 혹은 그들이 호모 사피엔스로 분류된 약 15만년 전 즈음으로 정의된다.

언어가 위대한 이유는 그것이 보이는 피상적 개념의 크기보다, 함유하는 요소들의 합이 더욱 크기 때문이다. 인간으로 치면 외유내강하다는 표현이 꽤나 잘 어울려 보인다. 겉으로는 그 쓰임새나 모습이 융통적이고도 부드럽지만, 사실은 하나의 언어가 함유하는 세계관은 모든 학문의 최종 목적지로 보일 정도니 말이다. 언어는 사회과학자들이 연구하는 ‘사회’를 담고 있으며, 수학자들이 연구하는 ‘개체의 사고’를 차용하며, 역사학자들이 연구하는 ‘역사의 흐름’과 함께하며, 과학자들이 연구하는 ‘시간’을 나타낸다. 사실 무엇보다도, 세상 모든 지식인들과, 사업가들과, 그리고 이들 모두를 아우르는 위대한 사람들과 그들의 기이한 업적은 언어 없이는 형성되지도, 전달되지도, 발전되지도 못했다. 아마도, 유발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역설하고자 했던 인지혁명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어는 그 자체로는 원재료에 가깝다. 언어는 사용자와 도구가 없다면 존재가치가 없다. 역설적이게도 본질은 항상 이런 식이다. 그 무엇보다도 대단한 것처럼 언어를 묘사했으면서, 이 언어라는 놈은 나같이 텍스트를 생성하고자 하는 사용자와, 텍스트 생성의 도구 따위 뿐인 ‘글쓰기’가 없으면 그 가치의 효용은 존재하지 않는, 마치 사람이 없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것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는 사용자 중심인 것이다. 언어를 이용해 텍스트를 구현한 ‘사용자’가 그것의 표현을 지배한다. 동시에, ‘사용자’의 표현은 구현된 텍스트를 해석하는 ‘독자’들에 의해 최종적으로 해석되고 평가된다. 재미있는 것은,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사용자’에 따라 가변하는 텍스트의 성질처럼, 같은 텍스트를 읽어도 ‘독자’에 따라 그 평가와 해석은 달라진다는 것이다.

문제는 최근 까지만 해도 해석의 트렌드, 그니까 높은 평가를 받는 텍스트의 기준은 절대성이었다는 것이다. 그 어떤 독자가 읽어도 동일한 관점을 느끼게 해주는 텍스트가 최근 몇 십년간 인류의 위대한 텍스트의 기준이었다. 물론 장점도 있다. 정보글의 형태에서 그러한 텍스트는 오해의 위험을 최소화하고 언어의 사용자 관점을 뚜렷하게 관철시킨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것은 재미가 없다. 하나의 텍스트를 보고도 다양한 관점이 분명히 존재하고, 이는 독자들에게는 해석과 관점의 자유로움을, 사용자들에게는 저량으로 존재하는 그들의 관점을 유량으로 바꾸는 매우 필요한 다이내믹을 수여한다.

글은 나를 표현하는 가장 미묘한 방법론이다. 우리는 글을 쓸 때 막 쓰지 않는다. 혹은, 막 쓰는 것 마저 의도된 기술인 것이다. 텍스트의 사용자들은 본인들의 가치관을 담는다. 간단하게 중요한 부분만 강조해서 쓰는 사람이 있는 반면, 복잡한 논리구조를 선호하는 사람이 있다. 글에 자신의 사상을 집요하게 삽입하는 열성 지지자가 있는 반면, 그것에 반대한 채 보수적인 중립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 유머러스하게 글을 풀어내는 사람이 있으며, 전문성을 강조하는 사람이 있다. 문법과 구조를 텍스트의 아름다움으로 느끼는 사람이 있으며, 약간의 어눌함과 결핍을 중요한 매력으로 꼽는 사람이 있다.

하나의 포인트와, 하나의 주제를 가진 글에도 사용자의 인생이 담기고, 감정을 녹여내며, 그들의 멋과 결핍이 뿌려진다. 모든 것의 뿌리는 원재료인 언어의 있지만, 그 언어를 재료로 요리하는 텍스트 사용자들에 의해 완성된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그 요리들을 같은 맛으로만 즐길 것을 명시받았다. 사실은 누구한테는 삼삼한 그들의 텍스트가, 누구에게는 매우 자극적인 음식이 되었을 수도, 누군가에게는 건강하고 담백한 텍스트가, 누군가에겐 알러지를 유발하는 음식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텍스트는 나에게 너를 보여주는 최고로 세련된 도구이며, 나의 텍스트에 대한 너의 답변은 너가 나한테 보여주는 최고로 솔직한 반응이다.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가장 가치를 느끼는 것이 ‘관계성’인 나에게 너와 나 사이에 둔 텍스트는, 그 시작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수단인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가장 지루할 수도 있는 검은글씨들이, 우리 사이에선 가장 설레고 정열적인 세레나데가 되는 것이니.

Editied by Seo, Yong Jang

Related Tags